ㆍ기억과 재생, 예술의 사회성
사회와 예술의 만남을 가장 첨예하게 매개하는 공간은 마을이다. 마을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의 장이기 때문이다. 마을을 공공적 장소로만 이해했을 때와 공공적 의제의 장으로 확산했을 때 차이는 분명하다. 대추리처럼 사라진 마을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과 문화명소로 되살아난 마을을 지역재생과 연결하는 것은 사회예술 비평과 실천의 과제다. 그것은 마을과 예술의 만남을 공진화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일이다. 대추리는 장소와 의제의 특정성이 공존한 사례로 사회예술 개념을 일깨웠고, 언급할 다른 마을은 공동체 예술과 도시재생의 관점에서 각자의 성과와 과제를 안고 있다. 양자 모두 장소와 의제,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적 공공성을 공유하는 사회예술이다.
평택 대추리 평화예술마을을 상징한 최평곤의 ‘파랑새’.
■ 대추리와 동피랑 - 마을의 생태와 예술
마을은 사라져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는 사라진 마을이다. 대추리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에 이어 생애 세 번째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2007년 마을을 비우고 떠나기 전까지 주민들은 절규했다. 965일간 촛불을 밝히며 그대로 살게 해달라고 외쳤다. 그곳에 예술가들이 함께했다. 2003년부터 4년간 가수와 시인, 화가와 현장예술가들이 노래하고 시를 짓고 벽화를 그리고 입체작품을 설치하면서 대추리를 평화예술마을로 만들었다. 1000명의 예술가들이 마을을 찾아 주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대추리에 인접한 도두리 출신의 음유시인 정태춘은 대추리 현장예술의 산파이자 주역으로 현장예술운동에 새로운 물꼬를 텄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빈집과 벽면 곳곳에 마을의 여망을 담은 플래카드를 걸었다. 최병수는 대추분교의 부서진 콘크리트 철근을 기둥 삼아 솟대를 만들었다. 최평곤의 ‘문무인상’ ‘파랑새’는 마을 수호신 역할을 했다. 이윤엽은 아예 빈집에 작업실을 꾸리고 ‘대추리주민역사관’을 만들었다. 김지혜는 옛날 대추리의 집합적 심리지도 그리기 작업을 진행했고, 이종구의 벽화와 노순택의 사진은 사회적 실천을 감성학적 실천으로 승화했다.
경남 통영포구의 중앙시장 뒤편 언덕에는 ‘동쪽에 있는 비랑(벼랑)’을 뜻하는 동피랑마을이 있다. 벽화마을로 유명한 이곳은 1970년대 이래 재개발계획이 끊이지 않았다. 2006년, 공원을 만들기 위해 주민설명회가 열린 후 ‘푸른통영21’은 주민을 설득, 벽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제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벽화가 있어 연간 방문객이 100만명에 이르는 문화명소로 거듭났다. 길게 줄을 서서 기념촬영을 하려는 방문객들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 당초 첫 사업비는 3000만원이었다. 이후 사업이 커졌지만 유명세를 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주민들이 사생활 침해로 불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갈등을 조화로 바꾼 것은 주민과의 소통이었다. 동피랑의 매력은 지킬 것은 지키되, 주기적으로 벽화를 새로 바꿔주는 혁신 마인드다. 화장실과 부엌, 마당 등 생활환경 개선사업을 펼치고, 빈집을 레지던스로 만들었으며, 카페와 공방 등 주민의 수익창출이 이어지면서 이젠 벽화마을에서 공동체 만들기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 이화동 벽화마을의 꽃무늬 계단(2006년).
■ 이화동과 감천 - 예술과 마을 그리고 관광
서울의 낙산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보이지만 엄연히 서울 성곽의 동쪽 축선이 이어지는 중요한 곳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주거공간이 난립한 낙산은 그 상징적 가치를 상실한 채 초라한 모양새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지탱해주는 슬럼가로 변했다. 이곳이 이화동 벽화마을이라는 이름의 문화명소로 바뀐 것은 ‘낙산 프로젝트’ 덕분이다. 문화부가 주최하고 공공미술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아트인시티 프로젝트’는 2006년을 공공미술 원년이라고 부르게 할 만큼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대학로, 낙산공원, 서울성곽 등은 낙산이라는 단일한 지역 아래 서로 맞닿아 있지만 서로 소통이 없는 섬처럼 존재하므로 이들을 연결하고 매개할 수 있는 공공미술을 통해 도시의 대안적인 환경을 구축했다. 소외된 지역의 생활공간이나 시설물 등에 예술적 실천을 통해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다양한 작품을 설치한 이 프로젝트는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으면서 서울의 대표적 공공미술 순례지로 각광받고 있다.
부산 감천동 태극도마을은 1950년대 후반 태극도 교도들이 집단거주하며 생겼다. 3400여가구에 9000명의 주민이 사는 이 마을도 예술이 함께하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2008년 무렵 재개발사업이 무산되고 문화부가 주최한 ‘2009 마을미술 프로젝트-꿈꾸는 부산의 마추픽추’를 시작하면서다. 예술감독을 맡은 진영섭과 예술가들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예술과 접목해 마을미술 프로젝트의 대표적 사례를 만들었다. 이젠 연간 100만명의 방문객이 다녀간다. 계곡과 능선을 타고 이어진 판자촌에서 출발한 이 마을은 골목과 색채로 방문객을 매료시킨다. 집과 집, 색과 색, 골목과 골목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숨막히는 광경이 매력적이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마을은 산개와 집약, 개체와 군집, 낱개와 연쇄가 공존한다. 슬레이트집과 슬래브집이 줄을 짓고, 일층집과 이층집이 나란히 있으며, 윗집과 아랫집과 옆집이 맞닿아 있다. 하늘색과 연두색, 파란색과 하얀색, 그사이를 비집고 구석구석 자리 잡은 보라색의 낭만이 이어진다. 집과 집 사이로 촘촘하게 뻗어 있는 골목길의 네트워크도 있다. 욕망의 분출과 절제가 공존한다. 주민들과 예술가들의 지혜가 곳곳에서 번득인다.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날개 벽화.
■ 공진화 관점서 재구성한 사회예술
대추리 현장예술은 예술적 실천을 통해 공론의 장을 만든 새로운 방식의 공공예술이었다. 또 그것은 대추리 주민이라는 문화적 소수자들에게 능동적인 문화생산을 매개한 프로젝트다. 나아가 특정 장소나 사안에 개입한 행동주의예술 프로젝트다. 대추리 예술가들은 마을의 공공성을 선택했으며, 주거권과 평화라는 의제를 다루었다. 마을은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함께한 현장예술은 민중예술의 시대 이후 지지부진했던 한국예술계에 ‘사회예술 재구성’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남겼다.
동피랑 벽화마을 프로젝트는 예술이 마을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도시재생 사업의 성공적인 모델로 꼽힌다. 2006년부터 2014년 말까지 푸른통영21 사무국장으로 일한 동피랑 벽화마을 기획자 윤미숙은 소통의 달인으로 불릴 만하다. 마을 만들기 활동가로 예술 프로젝트를 이끈 그는 철거 예정지가 관광명소로 바뀌는 과정에서 주민과의 소통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사전답사부터 주민들과의 갈등 해결, 행정과의 협업, 협동조합을 통한 주민소득 연계사업 창출 등 도시재생 사업의 핵심을 챙겼다. 행정과 주민과 재생 기획이 동행한 것이다.
이화동과 감천동은 정부가 주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낙산 프로젝트는 한국 공공미술 원년의 이정표라 할 만하다. 규모와 작품성 면에서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예술을 앞세우기보다는 공공성의 가치와 예술적인 자율성을 상호공존의 장에서 만나게 했다.
감천에서는 공공미술사업 시작 이후 지속적으로 골목길 가꾸기 빈집 프로젝트가 이어졌고, 주민추진협의체를 구성해 문화공간을 꾸렸다. 마을기업은 지붕 개량, 골목 정비, 색채 정비, 방음벽 설치, 집수리 등 주민에게 이익을 주는 사업으로 성장했다. 성공비결은 역시 주민의 참여다.
입구에서 바라본 부산 감천 문화마을.
마을벽화 사례들에 상찬의 요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작품들의 예술적 상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예술작품으로 각광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그것은 하향평준화의 길이다. 대중의 눈높이를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이화동은 작품의 수준 관리와 지역재생 개념의 재도약이 절실하다. 더 망가지기 전에 말이다. 원년의 예술감독 이태호가 다시 낙산 기슭에 문화공간을 열고, 공동체 예술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다.
동피랑과 감천동도 작품 관리와 예술을 매개로 하는 생활환경 개선을 지속해야 마을을 관광지로 대상화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뻔한 상상력으로 대중을 미혹하는 것은 사회예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반사회적인’ 예술이다.
김준기 | 미술평론가